본문 바로가기
소설

회귀 재벌 1940 - 독립의 길, 1화 - 낯선 시작, 차가운 가족

by 함바퍼포 2025. 3. 12.
728x90
반응형
SMALL
소설: 회귀 재벌 1940 - 독립의 길
1화 - 여덟 살의 첫걸음
“돈은 스스로 버는 거야.”
1948년 5월의 서울은 아직 해방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여덟 살, 한민수였다. 한씨 가문의 막내 아들로, 서울 중구에 자리 잡은 우리 집은 조선 말기부터 이어진 대지주 가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손잡고 섬유 공장과 무역으로 부를 쌓았던 집안은 해방 전까지 공장 네 개를 굴리며 돈을 쓸어 담았다. 아버지 한태영은 그 유산을 이어받아 서울과 인천에 공장을 운영하며 여전히 재벌로 군림했다. 하지만 1945년 해방 이후 세상이 뒤바뀌었다. 일본이 물러가며 무역이 끊겼고, 공장 두 개는 문을 닫았다. 그래도 집안은 부유했다. 쌀 한 섬(약 144kg)이 1만 5천 원에서 2만 원 사이로 거래되던 시절, 아버지는 한 달에 100만 원 넘는 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그 부는 내게 오지 않았다. 형 한진수는 열세 살이 되어 아버지의 사업 서류를 들여다보며 장남으로서 대접받았다. 아버지는 늘 말했다. “진수는 가문을 잇는다. 장남이니까.” 누나 한영희는 열한 살에 어머니 최옥주와 함께 금붙이와 쌀을 챙기며 집안을 돌봤다. 어머니는 누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영희는 똑똑하고 예뻐서 좋은 집에 시집가야지.” 그리고 나는? “민수는 조용해서 손 안 간다”는 말만 들었다. 용돈은 한 달에 300원. 쌀 한 되(약 1.8kg)가 200원에서 250원 사이로 오르내리던 때라, 그 돈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엔 2025년의 기억이 있었다. IT 기업가 김민수로 살며 쌓은 지식—주식 시장의 흐름, 산업의 변화, 그리고 역사의 전개.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였다.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하며 미군정이 끝났지만, 경제는 여전히 불안했다. 인플레이션이 심해 물가가 치솟았고, 암시장에서 미군 물자와 일본 밀수품이 거래됐다. 나는 알았다. 2년 뒤,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터진다. 전쟁이 끝나면 복구의 시대가 온다. ‘가족의 사랑도, 상속도 없어. 내가 만들어야 해.’ 나는 방구석에서 낡은 책을 펼쳤다. 조선일보 한 부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거기서부터였다. 여덟 살 꼬마가 돈을 벌기 시작한 건.

첫 번째 사업: 껌과 초콜릿 장사
1948년 서울엔 미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용산 미군 부대 근처 암시장에서 껌과 초콜릿이 팔렸다. 당시 쌀 한 섬이 2만 원에 가까웠고, 껌 한 통(10개入り)은 120원에서 150원, 초콜릿 한 조각은 40원에서 50원 사이였다. 동네 아이들은 그걸 보면 군침을 삼켰다. 학교 근처에서 미군 아저씨가 껌을 나눠주는 날이면 아이들이 줄을 섰다. 나는 2025년의 마케팅 감각을 떠올렸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을 만들면 돼. 아이들이 원하는 걸 팔자.’

 

용돈 300원을 손에 쥐고 시장으로 갔다. 낡은 군복을 입은 아저씨가 노점에서 껌을 팔고 있었다. “아저씨, 껌 한 통 얼마예요?” 내가 묻자 아저씨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120원이다, 꼬마. 돈 있냐?” 나는 주머니에서 300원을 꺼내 보여줬다. “두 통 주세요.” 아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껌 두 통을 건넸다. 240원을 주고 60원을 남겼다.
집 근처 골목으로 갔다. 아이들이 공깃돌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야, 미군 껌 먹을래? 1개 20원!” 내가 외치자 아이들이 몰려왔다. “진짜야? 줘!”라고 소리치며 손을 내밀었다. 한 아이가 주머니에서 20원을 꺼내 줬고, 또 다른 아이가 어머니에게 달려가 돈을 받아왔다. 두 통, 20개를 두 시간 만에 다 팔았다. 240원으로 400원을 벌어 160원 이득이었다.
“야, 민수! 껌 어디서 났어?” 동네 꼬마 철수가 물었다. 나는 씨익 웃었다. “비밀이야.” 다음 날은 더 했다. 300원으로 껌 세 통(30개)을 사서 학교 근처로 갔다. 수업 끝나고 아이들이 쏟아져 나올 때였다. “최신 미군 껌이야! 씹으면 달콤해!”라고 소리치자 금세 팔렸다. 360원으로 600원을 벌어 240원 이득이었다. 하루 240원은 쌀 한 말(18kg)의 1/5 값이었다. 시장에서 쌀 한 말이 1200원쯤 했으니, 여덟 살이 이렇게 버는 건 큰돈이었다.

두 번째 사업: 신문 배달과 소식 전하기
껌 장사가 재미있었지만, 꾸준한 돈이 필요했다. 1948년엔 신문이 귀했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한 부가 30원에서 50원 사이였지만, 가난한 집은 사지 못했다. 동네 아이들이 신문 배달로 하루 20원에서 30원을 벌곤 했다. 아버지가 매일 아침 조선일보를 읽는 걸 보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신문을 배달하면서 돈을 벌자.’
아침 5시에 집을 나섰다. 신문사로 가는 길은 한 시간쯤 걸렸다. 신문사 앞에 서자 낡은 자전거를 탄 아저씨들이 신문을 싣고 있었다. “아저씨, 신문 배달하면 돈 줘요?” 내가 묻자 한 직원이 나를 쳐다봤다. “꼬마가 무슨 배달이야?” 내가 대답했다. “할 수 있어요.” 직원이 웃더니 말했다. “하루 10장 배달하면 25원 준다. 할 수 있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6시, 신문 10장을 받았다. 무겁긴 했지만 어깨에 메고 동네를 돌았다. 발바닥이 아팠지만, 하루 25원은 확실한 돈이었다. 한 달이면 750원. 쌀 세 되 반 값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25년의 지식을 썼다. 신문을 배달하며 어른들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쌀값이 더 오를 거예요. 미리 사두세요!” 해방 후 인플레이션이 심해서 물가가 계속 뛰었다. 1947년 쌀 한 섬이 1만 원이었다면, 1948년엔 2만 원에 가까웠다.
한 아저씨가 신문을 받으며 말했다. “꼬마가 뭘 안다고?” 나는 대답했다. “시장에서 쌀값이 올랐대요.” 다음 날, 그 아저씨가 나를 보고 웃었다. “네 말 맞았네. 쌀값이 300원 됐어!”라며 10원을 팁으로 줬다. 하루 35원에서 40원을 벌었다. 한 달이면 1000원 넘었다. 쌀 다섯 되 값이었다.

세 번째 사업: 폐품과 고철 팔기
1948년엔 폐품이 돈이었다. 일본이 남긴 고철, 깨진 유리병, 찢어진 신문지… 시장에서 고철 1킬로가 20원에서 25원, 신문지 1킬로가 10원에 거래됐다. 동네 아이들이 길에서 주워 팔곤 했다. 나는 이걸 체계적으로 했다. 동네 꼬마들 5명을 모았다. 철수, 영재, 만수, 그리고 쌍둥이 형제 동구와 서구. “너희가 고철 주우면 내가 돈 줄게. 1킬로에 15원!” 아이들이 눈을 반짝였다. “진짜야?” “응, 진짜야.”
다음 날, 아이들이 고철을 들고 왔다. 철수가 2킬로, 영재가 3킬로, 만수가 1킬로. 쌍둥이가 4킬로를 같이 가져왔다. 하루에 고철 10킬로가 모였다. 나는 시장에 가서 1킬로 20원에 팔았다. 수입 200원, 비용 150원, 50원 이득이었다. “야, 민수! 우리 더 주울까?” 철수가 물었다. 나는 말했다. “더 많이 주우면 1킬로당 5원 더 줄게!” 아이들이 경쟁하듯 뛰어다녔다. 골목마다 고철을 찾아 헤맸다.
한 번은 동구와 서구가 고철 한 덩이를 두고 싸웠다. “내가 먼저 봤어!” “아냐, 내가 주웠어!” 내가 달려가 중재했다. “반씩 나눠. 다음에 더 주우면 더 줄게.”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만에 고철 300킬로를 모았다. 수입 6000원, 비용 4500원, 1500원 이득이었다. 쌀 일곱 되 값이었다.

가족의 냉대와 갈등
내가 돈을 버는 걸 가족이 알았다. 어느 날, 형 한진수가 내 방으로 쳐들어왔다. “야, 너 껌 팔고 다닌다며? 한심하다.”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용돈으로 장사해.” 형이 비웃었다. “한씨 가문 꼬마가 시장에서 구걸이나 하고. 창피하네.” 속이 부글거렸지만 참았다.
누나 한영희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민수가 이상해요. 집안 망신이에요.”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조용히 좀 해라, 민수야.” 저녁에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민수야, 너 돈 번다던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껌 팔고, 신문 배달하고, 고철도 팔아요.” 아버지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깟 푼돈이 뭐냐. 진수처럼 사업을 배워.” 나는 속으로 웃었다. ‘푼돈? 이게 내 시작이야.’ 가족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내 길을 갈 거니까.

1950년, 전쟁의 그림자
1948년부터 1950년까지, 2년간 나는 5000원을 모았다. 껌과 초콜릿으로 1500원, 신문 배달로 2000원, 폐품으로 1500원을 벌었다. 1950년 6월, 열세 살이 됐다. 집안은 여전히 부유했지만, 공장 수입은 줄었다. 아버지는 “미국이 도와주면 다시 잘될 거야”라고 했지만, 나는 알았다. 곧 전쟁이 터진다.
6월 25일 아침, 라디오에서 소리가 울렸다. “긴급 속보입니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했습니다!”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아버지가 소리쳤다. “공장을 지켜야 해!” 형 한진수가 뛰어나갔다. “내가 물자를 챙길게요!” 누나 한영희가 금붙이를 숨겼다. 나는 조용히 방에 앉아 지도를 봤다. ‘전쟁은 3년 간다. 1953년에 끝나. 그 뒤 복구가 시작돼.’
밤이 됐다. 나는 낡은 배낭에 옷 두 벌과 5000원을 챙겼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어머니가 나를 봤다. “어딜 가?” 나는 대답했다. “나가요.” 어머니가 차갑게 말했다. “가려면 가.” 그 목소리가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2025년의 지식을 손에 쥔 채, 독립의 첫걸음을 뗐다.

 

 

728x90
반응형
LIST